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4 후퇴 (문단 편집) ===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 === 제1차 공세로 간을 본 중공군과 북한군은 제2차 공세를 펼쳐 [[청천강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격파하는 한편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 제1사단을 포위하고 [[장진호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12월 4일에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평양 철수|다시 내주면서]] [[삼팔선]]까지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 뒤 [[12월 6일]]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이렇게 물러나는 동안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에서는 [[흥남 철수|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해상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피해 간신히 빠져나온 미 해병 1사단 역시 12월 24일에 흥남을 통해 후퇴했다. 1, 2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된 유엔군을 보고 서방 국가들은 지레 겁을 먹고 중국과 협상하려 했다. 이때까지 서방 국가들이 주축이 된 [[유엔]]에서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목적이 단순히 '자국의 국경선 방어 또는 북한을 도와 전쟁 전의 영토인 38선 근처 영토까지의 회복'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중국과 휴전협상을 하려 했으나, 중국이 유엔 측의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제3차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전술(前述)했다시피 중국의 진정한 참전 목적이 유엔군의 한반도 축출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제3차 공세를 펼쳤으며 이 공격에 미군과 한국군은 맥없이 밀려났다. 유엔군의 경우, 38선에 방어선을 펼치긴 했지만 전선이 망가진데다가 워낙 병력이 부족해서 '''1개 [[대대]]가 10km 정도를 담당해야 할 정도로 중공군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방어선 곳곳이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가 펼치는 공세에 뻥뻥 뚫리면서 무너지게 된다. 미8군사령관인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은 이대로 있다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중공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 1월 3일에 서울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미8군]]에 내린다. 여기서 중공군에 포위당해서 전멸한 부대도 있다고한다. 결국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 함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 번 37도선([[평택시|평택]]-[[원주시|원주]]-[[삼척시|삼척]] 방어선)을 향해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이동했고, 미8군사령부도 [[대구광역시|대구]]로 후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